칠불사 설화 속 아름다운 마을 범왕
내 인생이야기가 시작된 곳은
화개 고을 끝 동네인 범왕이다. 범왕은 화개장터에서 십리 벚꽃 길을 따라 화개동천을 거슬러 쌍계사 방향으로 올라간다. 쌍계사를 지나고 신흥을 지나 골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산비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촌가는 자연과 어우러져 마치 군락으로 피어있는 야생화처럼 아름답다. 병풍 같은 산속으로 촌가가 하나, 둘 사라진 마을의 끝자락에서 지리산 정상 쪽으로 8km를 올라가면 그야말로 첩첩 산중에 범왕이라는 동네가 있다. 범왕은 해발 1,533m에 달하는 토끼봉 (반야봉을 기점으로 동쪽, 즉 24방위 중 정동(正東)에 해당되는 묘방(卯方)이라 해서 '토끼 묘(卯)'자를 써서 토끼봉[묘봉(卯峰) 또는 토봉(兎峰)으로 불리게 되었다.) 아래에 있다.
내가 태어난 범왕의 지명은
칠불사의 창건설화에서 유래되었으므로 여기에 칠불사의 유래를 소개하고자 한다. 가락국 수로왕 7년, 수로왕의 왕비 허황옥(許皇玉) 공주가 인도의 아유타 왕국에서 東으로 오면서 불교가 전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허황옥은 수로왕의 왕비가 된 뒤 왕자 열 명과 두 공주를 낳았는데 태자(太子) 거등(居登)은 왕위를 계승하고 차자 석(錫)왕자, 3자 명(明)왕자는 어머니 허왕후의 성을 이어 김해 許씨의 시조로 봉해졌다. 그리고 남은 일곱 왕자는 허왕후의 오빠이며 인도의 승려로 가락국에 함께 온 보옥선사(寶玉禪師, 장유화상이라고도 함)를 따라 승려의 길을 걷는다.
일곱 왕자는 외삼촌인 보옥선사를 따라
합천 가야산, 의령 수도산, 사천 와룡산을 거쳐 수도생활을 하다 지리산으로 들어와 반야봉 동남의 주능선인 토끼봉 아래에서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수도에 들어갔다. 일곱 왕자와 보옥선사의 피나는 수도생활은 헛되지 않아 유난히 달 밝은 어느 날밤 일곱 왕자는 드디어 세속에서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 수로왕과 허왕후는 성불한 일곱 왕자를 보기 위해서 칠불로 왔으나 보옥선사는 불법의 엄한 계율에 따라 수로왕과 허왕후를 왕자들과 쉽게 대면시키지 않았다. 대신 칠불사 경내의 맑고 푸른 연못을 지켜보라 했다. 빛이 교교한 못 속에는 황금빛 가사를 걸친 일곱 아들이 공중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뚜렷이 나타났다. 왕후에게는 이것이 아들들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 연못은 ‘그림자가 비쳐진 연못’이라 하여 ‘영지(影池)’로 불린다. 그로부터 일곱 왕자가 수도하던 운상원, 즉 칠불암이 칠불사로 불리게 되었다.
수로왕이 머물렀다는 '범왕부락', 허왕후의 임시 궁궐이 있던 곳은 '천비촌', 수로왕이 도착했을 때 저자(시장)가 섰다는 '저자골', 어두워질 때 왕후가 당도하여 어름어름했다는 '어름골' ,삼정승이 기다렸다는 '삼정' 등 칠불사 인근에는 지금도 이 전설과 관련 있는 지명이 사용되고 있다.
칠불사엔 우리나라 건축역사에 소중한 자료인
아자방(亞字房)이라는 것이 있다. 아자방은 신라 효공왕(897~911)때 담공선사가 이곳 칠불사 벽안당에 8m의 이중 온돌방을 만들었는데, 방의 모양이 아(亞)자와 같아 '아자방'이라고 부른다. 아자방은 '세계건축대사전'에 기록될 정도로 독특한 양식을 하고 있다. 이 온돌은 한번 불을 피우면 49일간 따듯함을 유지한다고 한다. 아자방은 건축 이래 한 번도 개보수 한 적이 없다고 하며, 백년마다 한 번씩 아궁이를 막고 물로 청소하면 아무런 탈 없이 불이 잘 지펴지고 방 주위의 높은 곳부터 따듯해져 그 온도가 오래도록 유지된다고 한다.
아자방은
스님들의 수도하는 공간이며, 이곳에서 수도하여 득도한 고승들도 수없이 많다. 그 예로 먼저, 한국 다도(茶道)의 중흥조 초의(艸衣)선사는 1828년 43세에 이곳 아자방에서 다신전(茶神傳)을 초록(抄錄)하여 동다송(東茶頌)의 기초를 정립하였다. 또한, 근세의 선지식으로 선. 교. 율(禪・敎・律)을 겸한 용성(龍城)선사(기미독립선언 33인中 1人)가 납자(衲子)들을 제접(堤接)하는 여가에 귀원정종(歸源正宗)을 저술하였고, 해방이후에 석우(石牛), 효봉(曉峰), 금오(金烏), 서암(西庵), 도천(道泉), 자운(慈雲), 지옹(智翁), 일각선사 등이 가람이 불타기전에 이곳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하였다.
복원 후에는
일타스님, 청화스님 등 많은 스님들이 아자방에서 안거하였고 지금도 수많은 청풍납자(淸風衲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으며 운상원과 아자방에는 20여명의 눈 푸른 선객(禪客)들이 불철주야 반야의 보검을 갈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48년 12월 지리산 공비토벌 때 국군의 방화로 아자방을 비롯한 대가람이 모두 불타버리고, 30여 년 동안 폐허된 채로 있다가 제월통광(霽月通光) 선사의 대원력에 의해 1978년부터 20여 년에 걸쳐 대작불사를 일으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亞)자방은 현재 보존을 위해 방문객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칠불사 창건 설화에 의하면
내가 태어난 곳이 당시 수로왕이 머물던 범왕사이다. 지금은 범왕이라는 마을지명으로 사용되고 있다. 범왕은 산이 평풍처럼 겹겹이 둘러싸여 있는 하늘 아래 첫 동네다. 이른 아침이면 안개와 구름이 맞닿아 어디가 땅이고 어디가 하늘인지, 그 오리무중엔 인간과 신선도 구분 할 수 없다. 산비탈 양지바른 곳에는 삿갓하나 놓으면 가려지는 천수답이 구불구불한 모양으로 있고, 그 올망졸망한 밭에는 잡곡들이 시절 따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밭도, 논도, 대부분 산에 있었던 범왕은
동네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골목길마저도 산과 들로 곧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길을 따라 밤마다 맹수들의 표호 하는 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문풍지 우는 소리 보다 더 크게 들렸다. 도깨비불이 번쩍거리던 칠흑 같은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나면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 어머니 부엌문 여는 소리에 산천이 깨어나고 초가집들 사이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면 화답이라도 하듯 산등성이마다 운무가 피어오른다. 나는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범왕에서 안동 권씨 36대손으로, 3남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토끼봉 아래 범왕마을은
사람을 분노하게 하는 그 무엇도 사람을 슬프게 하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고 오로지 자연을 닮은 사람들이 혈육처럼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빈농에서 태어난 그들은 대를 이어 농사를 짓고 가난을 대물림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가 다 가난하였기에 사는 것이 다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척박한 산동네 사람들은 동창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이슬이 흠뻑 젖은 산길을 헤치고 다랑이 논을 들려보고 꼴을 한 망태 베서 집으로 돌아와 아침을 먹었다.
농부아들은 매일 아침마다 농부이었던 조부, 부친에게 농작물의 상태를 일일이 말씀드리고 오랜 경험에서 얻은 지혜를 배웠다. 아이들은 개와 산비탈을 달리며 작은 날짐승들을 쫓으며 자랐다. 부모들은 쌀 한 톨 없는 잡곡에다 감자 어깬 밥으로 아이들을 먹여 놓고 밭에서도 논에서도 연신 "뛰지 마라 배 꺼진다."라고 소리쳤다.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산으로 들로 달음질을 하며 놀았다. 나도 가난한 어머니의 "뛰지 마라 배 꺼진다."하는 소리를 귓등으로 들으며 성장했다.
강물이 모든 골짜기의 물을 포용할 수 있음은 아래로 흐르기 때문이다. 오직 아래로 낮출 수 있을 때에야 결국 위로도 오를 수 있게 된다. -회남자(淮南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