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佛寺 이야기

삶이 역동하는 화개장터

삶이 역동하는 화개장터

 

 

섬진강 청류와 화개동천이 만나는 곳에

조영남의 노래 속에 나오는 그 유명한 화개장터가 있다. 옛날 화개장이 명성을 떨치던 시절에는 각 지방에서 찾아 든 보부상과 장돌뱅이들로 활기가 넘쳤다. 이렇듯 유명한 화개장터는 내가 태어난 곳 범왕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는 소달구지 타고 아버지를 따라 장터 구경 한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지금은 모든 것이 다 옛날이야기가 돼 버렸지만,

화개장이 서는 날이면 골 안 사람들은 새벽부터 수확한 농산물과 땔감 등을 머리에 이고 지고해서 몇 십 리 길을 걸어서 장을 갔다. 그 긴 삶의 행렬은 장관이었다. 짐을 가득 실은 소달구지는 신작로에 뽀얀 먼지를 일으키면서 삐거덕 덜컹거리며 가고, 소달구지를 모는 아저씨는 빨리 가자고 "워워-"하며 고삐를 잡아당겼다. 채찍질에 소는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똥을 신작로에 갈기듯 싸고, 그 뒤를 염소, 돼지, , 닭들이 오합지졸 부대처럼 뒤 따랐다. 짐승의 울음소리와 짐승의 무리를 모는 사람들의 부산하고 시끌벅적한 소리는 화개 골 안을 가득 메웠다. 화개장터에 우마차가 하나 둘 도착하고 하역한 짐들이 높게 쌓여 가면 사람들이 모여들고 물건을 훑어보는 장사꾼들의 눈빛 또한 예사롭지가 않았다. 그 날의 물류 양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새벽 일찍 제일 큰돈이 오고가는 곳이 우시장이다.

지금은 현대식 상가가 들어서서 우시장은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지만, 현재 복원된 화개장터 바로 건너편이다. 시골에서는 소가 제일 큰 재산인지라 우시장에 흥정이 시작되면 빳빳한 긴장감이 모래바닥을 스멀스멀 맴돌고 분위기가 분위기만큼 농담을 주고받는 사람도 없다. 소 장사는 남의 소를 보고 인정사정없이 자기 주관적인 판단과 실질적으로 거래되는 시세를 반영하여 금을 놓지만 소 주인은 주인대로 바라는 금이 있어 서운하다. 그래서 흥정이란 탱탱하게 밀고 당기다가도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물러서야 성사가 이루어진다. 흥정이 성사되면 소 장사는 허리에서 기다란 전대를 풀어서 값을 지불한다.

 

"!" 하는

폭발음으로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곳이 있는데, 바로 뻥튀기 아저씨가 있는 곳이다. 장날마다 뻥튀기 아저씨는 매우 바쁘고 손님들은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그 줄이 여간 긴 것이 아니어서 사람들은 쌀, 옥수수, , 수수, 가래떡 말린 것들이 들어 있는 깡통, 보따리, 자루를 차례대로 길 위에 줄 세워 놓고 다른 볼 일을 보로 갔다. 장터에 돌아다니는 아이들은 뻥튀기 아저씨 주변으로 몰려와 땅에 떨어진 밥상이나 옥수수 튀긴 것을 주워 먹느라 아무리 쫓아도 도망가지 않았다. 도망가기는커녕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튀밥 주워 먹을 기회만 호시탐탐 노렸다. 인정 많은 아주머니들은 아이들에게 튀밥을 한 움큼씩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장날에 남자들이 꼭 찾는 곳이 대장간이다.

대장간 안에는 웃통을 벗어던지고 이마에 하얀 수건을 질끈 동여맨 대장장이가 커다란 화덕 앞에 서서 땀을 뻘뻘 흘리며 풀무질을 하고 있다. 팔뚝근육이 불끈불끈 쏟아 올랐다 내렸다 수차례하고 나면 화덕안의 골탄이 파란 불길을 내뿜으며 힘차게 타오르고, 그 때 쯤 대장장이는 풀무질을 멈추고 쇠를 넣어 벌겋게 달구었다. 쇳덩이(시우쇠)가 적당하게 달구어지면 기다란 집게로 꺼내어 모루 위에 올려놓고 박자를 맞추어 강하고 여리게 묵직한 쇠메로 때렸다. 그런 후 그 쇠를 물에 넣어 식혔다. 이렇게 무쇠를 달구질하고, 매질하고 담금질을 반복해서 호미, , 도끼, 칼 등 온갖 농기구를 만들어 내었다. 대장간에서 호미와 낫을 새롭게 사기도 하지만 무디어진 낫의 날을 벼르고, 호미의 모양을 바로잡고, 도끼의 날도 세웠다. 그때만 해도 농경사회라 소와 더불어 호미와 낫은 생활에 없으면 안 되는 필수품이었다. 그런 사회적 환경으로 인하여 농기구를 만들어 내는 대장간은 장날마다 사람들로 붐볐으며 호황을 누렸다.

 

화개 골에는 고사리, 토란줄기, 말린 취나물, 버섯, , , 곶감, 녹차가 많이 생산되는데 그중에서 고사리와 밤이 유명하다. 화개사람들은 산간지방에서 나는 토산물을 팔고, 남해나 여수에서 들어온 건어물이나 생선, 젓갈류 등을 샀다. 물건을 사고팔면서 영호남의 구수한 사투리로 흥정을 하는데 그 모습은 참으로 재미있고 정겹다. 시골 장에서는 물건 흥정하는 방법도 시골사람답게 토속적이다. "나는 어느 마을 어디에 사는 아무개인데, 어디 동네 사는 누구요?". 상대방이 몰라주면 사돈팔촌에서 이웃사촌까지 다 들먹인다. 그래서 서로 아는 사람이 있으면 그 날 흥정은 두말할 것도 없이 성공적으로 끝난다. 순박하고 정 많은 시골사람들이라 누구에게나 마음을 쉽게 열었다.

 

가난한 시골 사람들이 죽어라 일해서

장에 가져 온 물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돈으로 따져 몇 닢 되지 않는 것들이다. 그러나 견물생심이라고 그릇집 앞에 서면 그릇 사고 싶고, 옷 가게 앞에 서면 옷 사고 싶고, 떡집 앞에 서면 떡 사먹고 싶어진다. 특히 장터 안에 있는 이팔만 씨 식육식당에서 파는 돼지국밥 한 그릇에 진한 막걸리 한 사발 들이 키고 싶은 마음은 장을 보러 온 사람들의 작은 소망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가족들 생각에 매번 입맛만 다시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사람들이 붐비던 시장도 해가 기울기 시작하는 오후 세시쯤이면 파장 길에 접어들고, 밀물처럼 밀려왔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장바닥이 드러날 때쯤이면 장사꾼들도 슬슬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주막에서 한 잔 들이킨 막걸리에 곤궁한 삶을 잠시 잊고, 한 잔이 주는 취기를 지게에 담아 휘적휘적 흔들거리며 저무는 해와 더불어 재를 넘어갔다. 이렇듯 화개장터는 고단한 우리네 삶의 전부가 전시되는 길 위의 화랑이었다.

 

그러나 화개장터도 여러 가지 이유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되고 유명무실하게 되자 하동군에서는 영호남의 교류와 영호남 화합의 상징인 이곳 화개에 옛 화개장터의 명성을 복원하고자 199912월에 화개면 탑리 762 번지 등부지 3천여 평에 약 17억 원을 들여 전통장옥3, 장돌뱅이들의 저잣거리와 난전, 주막, 대장간 등 옛 시골장터 모습을 원형 그대로 되살리고 널찍한 주차장과 화장실 등 편의시설을 곁들인 시설을 지어 만남과 화합의 장소로서 화개 장을 복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1년 봄, 화개장이 개장되고 주위 쌍계사와 지리산과 연계된 관광문화 상품으로서 자리 매김하고 있다. 현재 화개장터에는 하동지역과 인근 구례, 광양지역의 특산물을 전시 판매하는 상설장터가 서고 있고, 난전 및 뻥튀기장수, 엿장수가 시골장터의 정감을 더하고 있다.

 

관광객 중에 새롭게 복원된 화개장터를 보고

실망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매우 안타깝다. 화개장터의 역사를 모르고 복원된 화개장터만을 대충 한번 둘러본다면 영화를 찍기 위해 만든 세트장 같이 보일 수도 있다. 필자는 이것은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의 한계라고 본다. 그러나 화개장터 역사를 알고 섬진강을 보라. 저 멀리 하얀 돛을 바람에 펄럭이며 강을 유유히 건너오는 나룻배가 보일 것이다. 화개장터에 내다 팔 물건들을 배안 가득 싣고 강바람에 얇은 옷깃을 여미며 배 가장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옛사람들의 소박하고 곤고한 모습이 보일 것이다. 사월이면 화려하기 그지없는 십리벚꽃 길에서도 우마차와 등짐을 진 옛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와 거친 숨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따스한 손길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네 아버지였고, 어머니였으며, 할아버지였고, 할머니였다. 역사를 알고 마음의 눈으로 화개장터를 보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의 믿음만큼 젊고 자신의 회의만큼 늙었으며 자신의 자신감만큼 젊고 자신의 절망만큼 늙기 마련이다. -베니 S시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