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佛寺 이야기

통광스님이 본 탄허스님

  
 통광 스님 / 범어사 강원 수료, 칠불암 복원, 쌍계사 주지
칠불암 회주, 쌍계사 승가대학 학장
 

고려대 교수들에게 ‘장자’ 강의
유불선 통달해 ‘예언가’로 오해
스승 한암 스님의 선교가풍 이어
운허·관응과 함께 3대 강사

 

 

-스님은 탄허 스님의 전강제자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우선 탄허 스님을 만나게 된 배경부터 듣고 싶어요. 

저는 지리산 자락의 화개에서 태어났어요. 유년 시절에는 한약국을 하시면서도 서당을 열었던 아버지에게 유교의 사서, 고문진보 등을 배웠어요.

 

그런데 그 무렵에 내 은사이신 여환스님이 연곡사 서굴암에 계셨어요.

그때 제가 여환 스님을 모시면서 한의학 공부를 하다가

그만 청나라 순치 황제의 출가시와 신라 부설거사의 사부시(四浮詩)를 듣고서는

출가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어요.

 

그리고 이종익의 소설 〈사명대사〉를 읽고는 육체의 병을 낫게 하는 의사보다는

마음의 병을 낫게 하는 도인이 되고 싶은 생각도 들었고,

여환 스님으로부터 화두 참구를 하면 우주의 본체 생명자리를 알 수 있다고 들어서

1958년에 출가하였지요.

 

그래서 여환 스님을 따라 범어사에 와서 스님이 되어 공부를 하였는데,

내가 속가 시절에 한문공부를 하다 보니 자연적으로 유불선 삼교를 다 배우고 싶은 마음이 일었는데 스님들이 유불선을 달통한 스님이 탄허 스님이라고 해서

탄허 큰스님을 한번 만나 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언제 어디에서 처음으로 뵈었는가요?

스님은 부산 삼덕사에서의 화엄경 교열 작업에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삼덕사 시절을 회고해 주세요.


거기에서는 만 6개월을 작업하였지요.

대중들과 함께 하기 이전에 탄허 스님은 김상숙과 화엄경 원고의 초고를 미리 맞추어 봤어요. 김상숙은 숙대국문과를 나왔지요.

나도 오전에 미리 하는 거기에 참여하였는데, 탄허 스님이 화엄경을 만년필로 낱낱이 번역한 것을 셋이 다시 한 번 싹 읽어보는 것이지요.

 

나는 아침에 그렇게 하는 데에 참여하였다가,

그 후에 전체 대중들과 같이하는 작업에도 참여하였어요.

그러니깐 하루에 열여섯 시간을 다 들었지요.

 

그때에 있었던 대중들은 여럿이었어요.

각성스님, 무비스님, 비구니 성일스님이 있었고, 자민스님은 왔다 갔다 하였고,

명호근도 오고 김운학씨도 한번 다녀갔지요.

 

외호대중으로는 스님의 사위인 우담거사가 있었는데

그때에는 무용이라고 그랬어요. 또 민족사 사장인 윤창화는 시봉이었는데

서장을 읽는 것을 본 탄허 스님이 창화가 문리가 어지간히 터졌다고 하셨어요.

 

인허스님도 있었는데 그때 그 스님은 원각경 게송을 달달 외웠지요.

그리고 내 고향에서 나를 따라온 권학만이라는 학생도 있었어요.

탄허 스님이 권동이라고 불렀던 그 친구는 그 후에 대원암까지 탄허 스님을 따라가서 스님에게 그때 돈 4만 원을 학비로 받아서 학원을 다녔는데

지금은 부경대학의 총무과장으로 있어요.

탄허 스님은 대중들에게 장자 강의를 한번 해주셨어요.

 

-스님은 그 후에도 탄허 스님을 뵙고, 배웠겠지요. 

그럼요. 나는 그 후에 봉은사에 있었던 동국역경원의 제2기 역경사로 뽑혀서

봉은사에 있으면서 공부를 했어요. 스님은 그 후에 서울의 청룡사, 보문난야,

대원군별장, 대원암에 계셨는데 나는 종종 가서 인사를 드렸지요.

 

그리고 청룡사에 계셨을 때에는 청룡사 문간방에서 나하고 무비스님,

그리고 법주사의 월은 스님 이렇게 셋이 탄허 스님에게 장자를 배웠지요.

그 무렵에 탄허 스님이 고대의 시계탑이 있는 교실에서 고대 교수들에게 장자 강의를 하셨어요.

 

그래서 나하고 돈연이가 고대에 가서 저녁에 하였던 그 강의를 들었지요.

강의를 듣고서 봉은사로 늦게 오게 되어 할 수 없이 담을 넘어서 들어왔더니

법정 스님이 그걸 빗대서 말을 하기도 했어요.

 

또 청계천에 있는 풍전상가에 있었던 덕산거사의 삼보법회에서

스님이 기신론 강의를 할 때에도 가서 끝까지 다 들었지요. 그때 대원암에 갔더니

유생인 심백강이 스님에게 장자를 배우려고 왔던 것이 생각나네요.

 

  
 강원에서는 탄허 스님의 현토 직역을 참조해서 공부하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1982년 겨울 사교·대교 과정의 경전까지 완역한 기념으로

  월정사에서 하였던 강의는 들었는가요?


그 강의는 못 들었어요. 왜냐하면 그때에 칠불암에 있으면서

칠불의 복원에 신경 쓰고, 복원불사에 주력하는 바람에 나하고 무비스님은

듣지 못하였지요.

 

그렇지만 강의하는 도중에 부산 신도를 동원해서 과일 여러 박스를 싣고 가서

찾아뵈었지요. 가니까 밤 여덟 시가 되었는데 스님 방에 불이 꺼져있고 스님이 주무시더군요.

 

그래 다음 날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는 “스님은 예전에는 하루에 열여섯 시간을

번역해도 피로하지도 않다고 하셨는데,

왜 그렇게 일찍 주무십니까?” 하고 여쭈었어요.

 

스님은 항상 당신은 무피염(無披厭),

즉 피로하지도 싫증나지도 않는 상태에 들어 있다고 하셨거든요.

그랬더니 스님 말씀이

“노인의 건강은 겨울 날씨와 같아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그러시더군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 강의를 꼭 들었어야 하는데,

그 이후에 못 들은 것이 내 마음에 안 되었다고 생각되었지요.

그것도 들었어야 하는데, 참 아쉬워요. 그 무렵 나는 칠불 복원에 애착이 붙어서

그 불사만 생각하였어요. 

 

-스님은 탄허 스님에게 전법게를 받았습니다. 이번 기회에 그 내용을 들려주세요. 

나는 스님으로부터 그것을 친필로 받았어요.

나 혼자서 1978년에 월정사 대웅전에서 받았지요.

그것을 받게 된 것을 말하면 내 자랑을 하는 것 같아서 그렇지만

탄허 스님은 “내가 여러 수좌를 봤지만 조사어록에 있는 것을 꿰뚫어 보는

선지가 있는 통광이 같은 사람은 별로 못 봤다”고 직접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그리고 나도 유불선 삼교의 회통에 관심이 많았지요.

그런데 그런 탄허 스님을 이런 시대에 만나고 배웠다는 것을 기쁘게 여겼어요.

그래서 전강을 받을 때에 나는 은사인 여환스님을 찾아가서

“제가 이번에 탄허 스님을 법사스님으로 모시고 싶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은사스님께서 아주 좋아하시면서 추천서를 써 주셨어요.

그 추천서를 받아서, 탄허 스님에게 갖다 드렸지요.

내가 왜 은사에게 이야기를 했냐 하면 옛날에 은사들이 당신 상좌가 법상좌가 되면 상좌를 빼앗겼다고 보고 서운하게 여기고 그래서, 미리 말한 것이지요.

 

월정사 대웅전에서 대중들이 있는 데에서 공개적으로 받았는데,

그것이 3월로 기억이 납니다. 그 게문은 〈방산굴법어〉에도 나오는데,

그 끝에는 요즈음 쓰는 불기가 아니고 세존응화로 시작되는 스님만이 쓰는

 옛날 불기로 쓰여 있지요. 그 게송이 참 좋더라구요.

그때에 받은 내 법호가 제월(霽月)이지요.

 

-스님은 탄허 스님을 어떤 스님으로 보시나요?
탄허 스님은 유교, 노자, 장자, 불교 등 모든 것을 잘하는 스님이에요.

그러면서도 화엄학에 심혈을 많이 기울여서 연구하셨어요.

 

그리고 취미로 노장학, 주역 같은 것을 하셨는데

불교는 당연시하면서도 그런 것에 너무 말씀을 많이 하시다 보니

예언가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탄허 스님은 정역을 갖고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그러니 스님은 점술로 하신 것이 아니고

현학(玄學)으로서, 철학적으로 하신 것이지요.

 

그 당시에 3대 강사로 불린 스님이 운허 스님, 관응 스님, 탄허 스님이에요.

내가 이 세 스님에게 다 배웠어요.

내가 역경사 2기생이고, 운허 스님은 동국역경원장을 하셔서 봉은사에서 주말마다 운허 스님에게 능엄경 강의를 2년이나 배웠어요.

 

운허 스님은 경전을 우리말로 옮기는 것에서는 최고지요.

나는 또 관응 스님이 대원정사에서 하였던 유식삼십송 강의를 20일간 들었어요.

평소에도 이 스님에게 자주 가서 관응 스님의 설법, 강의를 많이 들었어요.

 

이 스님은 분필 하나만 잡으면 하루 여섯시간씩 6개월을 교재 없이도 할 수 있다고 그렇게 자신만만 하셨어요. 하여간 이 스님은 대중 설법을 잘 하셨어요.

탄허 스님은 한문 원전을 갖고서 현토하고 번역하는 것은 최고예요.

스님은 한문의 리듬을 타면서 하는 토가 정확해요.

탄허 스님은 장자 내칠편을 다 외우고, 영가집 그걸 다 외우고, 기신론도 다 외우고, 주역의 계사(繫辭)도 줄줄 외웠어요. 그리고 칠판에 경전을 가득 써놓고,

그 판서한 것을 설명하시는데 기가 막혔죠.

 

-탄허 스님의 학문에는 특성이 있지요.
성균관대 한문과 교수를 하던 이진영이라고 있었어요.

이 선생은 역경원의 역경사로 있었고,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강의도 하였던 분인데

한문을 아주 잘해요.

 

탄허 스님은 이 사람을 보고 한문과 한시를 잘한다고 늘 칭찬을 하셨어요.

그러면서도 “그 사람은 종지(宗旨)가 없어”라고 하셨지요.

그리고 이진영은 탄허 스님에 대해서 탄허 스님이 쓰신 비석의 비문이나 책의 서문을 보면 작문은 잘 하는지 모르겠지만 종지를 추리는 것은 대단하다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최근 백 년 이내에 그런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그랬어요.

늘 그런 말을 했지요.

 

-탄허 스님은 선지에 의한 해석을 하신 것으로 볼 수 있지요.
나는 탄허 스님으로부터 당신이 경전 공부를 어떻게 하셨다는 것을 직접 들었어요. 탄허스님이 상원사에 처음에 들어와서 공양주를 하였더니

한암 스님이 너는 그런 것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서 3년 참선을 시키더래요.

 

그런데 그때 탄허 스님과 같이 온 사람이 두 사람이 더 있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것을 배겨내지 못하고 절에서 나갔대요.

언제인가 내가 칠불암에 있으니까 그중 한 사람이 나를 찾아와서

자기가 김택성과 같이 오대산에를 갔는데, 자기는 중간에 나왔지만 탄허 스님은

남아서 도승이 되었다고 위풍당당하게 말을 하였어요.

 

하여간 탄허 스님은 처음에는 조금만 있다가 그냥 가려고 하였는데,

한암 스님이 “자네는 글을 배워야 된다”고 하면서,

서울에 있는 대강백인 박한영 스님에게 가서 배우라고 그랬지만

탄허 스님은 “스님 밑에서 배우지 다른 곳에 가서 배우지 않겠습니다”고 하였대요.

 

그래서 한암 스님 밑에서 치문부터 선문염송, 전등록까지 전체를 강을 해서

한암 스님에게 바치면서 배운 것이지요.

탄허 스님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에 나처럼 둔한 사람을 못 봤지만,

나처럼 노력하는 사람도 못 봤다”고

그랬어요. 나는 그 후반부의 말이 인상이 깊어요.

 

-그 시절, 오대산 상원사에는 수좌들이 많이 와서

탄허 스님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종정을 지내신 고암 스님에게 탄허 스님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고암 스님이 상원사에 있을 때에 보니 탄허 스님이 만날 전등록, 선문염송을 보는데 토를 싹 달아서 한암 스님에게 가서 강을 해 바치더래요.

 

한암 스님의 증명하에 석사를 하는데,

해석하여 토를 다는 것을 석사한다고 그랬어요.

그렇게 하는데 하루에 한두 토만 시정을 할까 그랬대요.

 

화엄경을 할 때에, 요즈음 말로 하면 결사라고 그러는데 거기에서 무토로 되어 있는 화엄경의 토를 다 달았대요. 한암 스님이 선사이면서 한문과 교학에도 능통하시니

선교를 겸한 스승을 모시고 배운 것이었지요. 그런 가풍이 이어진 것이지요.

 

-올해(2012)는 성철스님 탄신 100년 행사가 진행되고 있어요.

내년(2013)엔 또 탄허 스님 탄신 100년 행사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그러다 보니 두 고승이 비교가 됩니다만.


성철 스님은 해인사라는 총림의 방장으로 계시면서 종정을 하셨고,

그리고 대중을 거느리면서 사셨지요. 또 원택이라는 스님이 있어 성철스님의 자료를 모으고, 정신을 계승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지요.

 

그렇지만 탄허 스님은

월정사가 6·25 때 전소되어서 오대산에 상주하실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월정사가 일부 복원되어 오대산에서 화엄경 특강을 하였듯이,

더 상주하시면서 그런 모임을 하였으면 좋았지요.

또 스님은 명당을 찾는다고 학하리에 가 계시면서 은거하시기도 했어요.

 

그리고 탄허 스님의 자료를 누가 모으고, 정리하지는 못하였지요.

그렇지만 탄허 스님이 스님들을 실질적으로 교육시키는 교재를 다 번역한 것은

대단한 거예요.

 

전통 강원의 교재를 다 번역함으로써

지금도 강사나 학인들이 탄허 스님을 찾고 있지요.

어느 비구니 강원에서 논강을 하다가 “탄허 스님을 모셨냐?”는 말이 나왔대요.

이 말은 탄허 스님이 현토하신 것을 보고 하는 것이냐는 뜻이지요.

 

이처럼 강원에서는 탄허 스님의 현토, 직역을 참조해서 공부하는 것이

근본, 전통이 되었어요. 탄허 스님 가신 지가 30년이 되었지만

강원에서는 살아 있는 것처럼 만날 탄허 스님이 나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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