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佛寺 이야기

미국과 유럽의 불교

미국의 불교 

현재 200만명 정도의 불교신자가 있으며 한국 불교보다 먼저 소개된 
 인도의 요가, 중국의 선, 일본의 좌선, 등이 관심을 끌기 시작 하면서 
 한국 불교의 선도 큰 매력으로 급격히 확장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한국 불교는 교민을 대상으로 하여 염불적인 불교와 미국 본토인을 
 위한 선불교가 병존하고 있는데 본격적으로 포교활 동을 벌인 것은 
1970년대에 들어와서 숭산 행원 스님이 처음이다. 그 이전에도 일붕 경보 스님등이 포교 활동을 벌여 큰 관심을 일으킨 적도 있다. 

  불교는 미국에서 3번째의 신도를 가지고 있는 종교지만 불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종교이다. 여기에서, 널리 퍼져있는 미국의 불교철학과 그의 성격, 교파 등에 관하여 분석해 보기로 한다. 

  사실 미국의 불교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에 관한 것은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몇몇 학설이 그 맥을 이루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중국의 스님들이 콜롬부스가 미국을 발견하기 전에 미국에 정착했다고 주장했고, 다른 학자들은 아직 서부에 정착한 아시아계의 이민집단, 중국, 일본인들에 의하여 미국에 불교가 소개되었다고 주장한다. 또 이와는 달리 옛날 미국의 원주 인디언들이 티벳인들 후손으로서 티벳불교가 아메리칸 인디언 속에 자리잡았다고 주장한다. 

여러 가지 미국불교의 시작에 관한 학설이 있으나, 여기에서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미국불교의 역사는 일반인들이 인식하는 것보다는 훨씬 깊고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대 미국불교의 시작은 미국에 이주한 아시아인들이 함께 옮겨온 그들의 불교정신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들 이민인들이 그들의 종교를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중 가장 활발히 종교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1898년에 샌프란시스코에 시작된 진도신수이다. 이 진도신수는 북미에 종교전파의 임무를 띠고 1942년에 미국불교로서 종단을 형성하여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또한 천태종(중국인), 신종수(일본)등이 미국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사실 하와이가 1959년에 미국의 한 주로서 인정되었지만 그들의 불교는 그들이 사탕수수밭의 노동력으로 이주할 때부터 함께 해온 1868년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미국불교의 중요한 역사적 현상은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종교대회를 통하여 찾아볼 수 있다. 이 대회에 참가한 불교인들에 의하여 불교정신이 미국인들에게 심겨지기 시작했다. 

  미국불교의 일반포교는 선에서 시작되었다. 불교학교의 스승인 소겐 사큐와 미국에 선을 포교하였다. 이 소겐의 선을 통한 불교의 가르침은 1905-6년에 미국에서 크게 부흥하였고 이러한 불교활동이 뉴욕시에 미국불교협회를 설립하였고, 미국불교센타는 1930년에 소겐의 제자인 소겐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현재에도 이 센타는 뉴욕 맨하탄31가에 '미국불교참선센타'로 존재하며, 선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아시아의 불교학자들이 미국에 그 분교를 설립하여 미국포교불교에 큰 역활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여기서 지적할 하나는 많은 미국인들이 아시아에 불교부흥에 기여한 미국불교의 역할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1875년도에는 아시아는 불교가 한국, 일본, 스리랑카, 인도 등에서 퇴보하고 있을 때 현대기술과 서구문화를 아시아에 소개하는 서구인들이 아시아인들의 전통적인 문화 즉 불교 등을 함께 발전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예를 들면 미국불교 부흥의 초석을 마련한 견신론자들이 아시아 불교부흥에 큰 역할을 하였다. 

  많은 아시아인들이 서구문화에 영향을 받아 그들의 전통적인 종교인 불교를 멀리하고, 서구종교인 기독교나 카톨릭 종교로 개신할 때. 이들 견신론자들은 아시아인에게 불교정신의 지혜를 전했으며, 불교정신은 개인의 정신과 마음의 향상을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물질만능주 시대의 등불이라고 가르쳤다. 

  여기에서 세계불교 부흥에 기여한 서양불교도인 헬렌나 페트르바 발베스티키((1831-1891)과 헨리 스틸 올코트(1832-1907)에 관하여 지적하고자 한다. 

 아시아의 위대한 불교학자나, 불교스승들은 서구불교학자들의 제자였다. 인도의 유명한 불교학자인 다하마나다 카삼바(1871-1947)는 헨리클락 왜렌의 제자였으며, 일본의 불교전문가인 먼쥬 나지오(1849-1927)는 독일의 막스 밀멀의 제자였다. 

  이에 아시아 불교에 미친 서구불교의 영향을 장단점을 떠나서 한가지 고려해야할 것은 물론 아시아의 불교가 서구인들에 의해서 부흥되었음은 좋은 현상일지라도 서구문화의 기본이 되는 기독교재단에 의해서 불교의 정신이 곡해되었다는 점이다. 

  다음은 역사적인 미국불교의 분석을 떠나서, 미국불교의 영향과 그 경향에 관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미국전역에 500개가 넘는 불교학교, 절, 불교회관, 협회 등이 퍼져 있다. 미국의 불교는 대부분 한국, 중국, 일본, 버어마, 스리랑카, 인디아, 타이완, 홍콩 등의 전통불교에서 유래되며 또 영국불교, 카나다불교 등의 서구불교 전통도 미국불교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미국불교의 전통이나 그 종파를 찾음에 스리랑카, 베트남, 서동아시아에서 출발된 테란벤을 들 수 있다. 이 테란벤 불교도들의 집회를 텍사스, 호클라호마 등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의 집회를 살펴보면 

1.베트남 불교회 

2.(라오불교 상하)미국 

3.캄보디아 불교절 

4.베트남 불교탑 

5.타이 불교절 

6.베트남 불교절 

  

이들 미국불교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어떠한 것도 영원하지 않음에 모든 것은 순간 순간 변한다. 

그 순간성의 사실은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한 생명이 태어나고, 다른 생명이 죽고, 또 모든 사람은 늙고 죽는 것이다." 

모든 서구의 심리학자들이 "자아"나 "아집"을 연구함에 우리의 경험을 통하여 이것들을 확립할 수 있다고 주장하나 모든 것이 영원성을 소유하지 않다고 가르치는 불교는 인간의 경험 또한 영원성과 확실성을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 불교도들은 세상의 영원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그러므로 자아의 인식은 허상이라고 가르친다. 좀더 상세히 설명하면 우리 인간이 자아를 인식함은 우리의 욕망, 욕구 등을 갈구하며 또 이것은 이기심으로 인식한다. 이러한 개인의 허상을 자아라고 믿는 마음의 상태가 모든 인간에게 생의 고통을 준다고 가르친다. 

  마음이 단지 개인의 인식에 의한 기능으로서 우리들이 인식하는 개인 혹은 자신 등은 단지 변화하는 육체적, 정신적인 힘이나 에너지라고 불교도는 가르친다. 

  여기에서 5가지의 기에(에너지)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1.물질 2.감각 3.인식 4.정신작용 5.의식이다.  

 이러한 다섯가지 에너지의 변화 작용하는 사실이 우리에게 "자아"로 잘못 인식되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 인식된 자아는 우리에게 집착과 고통을 준다. 사실 고통이란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불가분의 경험으로서 우리는 숨기거나, 부정하거나 그 고통을 잊기 위해서 다른 허상 혹은 환상을 믿을 여는 노력할 뿐이다. 사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이러한 고통을 이겨 보거나 막으려는 반복되는 행위를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불교인의 길이란 우리 인간이 필연적인 이 고통을 이기는 다른 세상을 찾는 것이다. 

  Theravada(테레바다)에서 4가지의 진실을 인간의 숙명적인 삶의 고통의 근본이라고 가르친다. 

 첫번째의 진실은 인간의 고통에 관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의 고통은 우리 인간이 주위에 존재하는 현상이나 환경과의 교차상태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삶을 직면함에 정신적인 육체적인 고통을 경험하는 것이다. 즉 사람이 그들이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거나 ,또는 원하지 않은 것을 해야 하는 등의 실망에서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또 자연의 섭리로서 인간에게 존재하는 고통이란 생. 노. 병. 사로서 우리 인간이 아무리 자신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돌본다 할지라도 우리 인간은 이것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자아의식' '이기심' 등이 고통을 일으킨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생에 대한 고통을 숨기기 위해서 쾌락이나 환상을 추구하고 또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미래에 대하여 꿈으로서 고통을 잊을려고 하지만, 자아의식이 그릇된 확신은 항상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다. 

  두번째의 진실은 사실의 근원이 고통이 되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해서 이것은 인간의 본능과 욕구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조정하거나 극기하기는 참으로 힘든 것이다. 

  테라비디엔은 우리의 욕망이 고통의 원인이 됨으로 우리가 이 욕망을 분명히 밝혀 이 욕망에서 벗어남으로서 고통을 없애야 한다고 가르친다. 개인의 감정이 욕망과 집념을 생기게 했으며, 이것이 우리의 생을 만들었고, 또 생명이 고통의 근원이 된다. 

  세번째의 진실은 개인의 노력으로 인간의 고통을 멈출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불교파에서 주장하는 개념이다. 생. 노. 병. 사의 윤회에서 벗어남이 고통을 이길 수 있는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가르친다. 

  네번째의 진실은 이러한 인간의 고통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말한다. 즉 개인이 어떤 범주에서 믿음으로 삶으로서 고통을 끝낼 수 있는 지혜를 말한다.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인간이 해야하는 것은 다음의 8가지 정도이다. 이러한 8가지의 정도를 훈련은 개인의 생활을 통하여 성사에 불구하고 계속되어야 하며, 이에 첨가해서 3가지의 마음 수양을 가르친다. 

  첫번째의 것은 지혜로서 우리 인간은 모든 사물의 현상으로 바른 생각으로 이해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의 삶을 밝혀줄 수 있는 도덕성을 말한다. 즉 인간의 행위는 정의로움에서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참선으로서 개인의 정신집중력과 통찰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집중하여 있을 때만이 우리의 지혜가 밝혀지며, 이곳에서 우리는 정의로운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넷째는 바른 이해로서 불교에서는 바른 이해를 불교도의 시작이며 끝이라고 가르친다. 다시 말해서 개인의 이해는 어떤 개인의 신념이나 인식에서 결정지어져서는 안되며, 개인의 극기에서 출발되어 형성된 지식과 통찰력에서 결론지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이기심을 이해하는데 ,불교의 바른 이해란 이기심을 버림에서 출발되어 개인의 깊은 심성에서 생겨난 완전한 이해를 말한다. 

  칼마의 법칙 혹은 인과설에서 우리는 바른 이해와 인간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바른 생각이란 남이나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파괴적인 이해와는 다르다. 바른말이란 아무런 해가 없는 말을 말한다. 위의 지혜, 도덕성,훈련(자기수양), 바른이해, 이기심극복 다섯가지외에 다음의 세가지는 정신적인 활동과 연관되어 있다. 

  여섯째는 불교도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에서 출발하는 바른 결정이다. 이것은 비록 우리 인간이 생을 삶에 여러가지 유혹이나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항상 우리의 의지를 곧게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일곱번째는 우리가 항상 일어나는 현상을 우리의 정신적 육체적으로 항상 깨닫아 꼭 바른 마음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위의 불교의 정도를 기본원칙으로 삼아, 끊임없이 우리 마음의 훈련을 쌓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자기 수양 중 겪어가는 우리의 마음이 상태에서 허상과 실상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또 우리는 수행중 "아집"을 극복해야 한다. 

  우리의 인식에는 허상(혼미)실상의 두가지가 있다. 허상이란 개인의 교육이나 경험에서 인식되며,이것은 우리 개인의 우리의 마음에 남아있는 성공의 순간들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고로 이것은 세상에 보여지는 현상 그대로를 인식하게 됨으로 그 인식이나, 판단이 세상의 실존현상과 항상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이란 불교의 가르침을 통하여 개인의 마음수양을 통하여 쌍의 현상을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불교도에서는 마음을 정신의 상태라고 규정 짓는다. 그 마음의 상태를 건강한 상태와 건강하지 않은 상태의 2가지로 규정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불건전한 마음의 상태란, 혼미, 찬상, 혐오, 거만, 거짓환각, 이기심, 창피, 질투, 무지 , 무식의 상태등을 말한다. 또 건강한 상태의 마음이란 깨달음, 통찰력, 융통성, 겸손, 신뢰, 확신, 침착, 신중 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통찰력과 주의성은 좀더 설명하고자 한다. 

 통찰력이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다. 또 이것은 삶의 진실성을 인식하는 것이며, 신중성이란 전체적 삶을 바르게 이해하며, 이 둘이 개인의 마음을 균형 잡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개인이 바른 통찰력과 주의력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바른 건강한 마음의 상태를 가릴 수 있다고 가르친다.

  두번째의 진실은 사실의 근원이 고통이 되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해서 이것은 인간의 본능과 욕구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조정하거나 극기하기는 참으로 힘든 것이다. 

  

다음은 대승불교 Mahayava Traditr(마햐야나)전통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Zen(선) 

 미국에서 찾을 수 있는 선의 시작은 버어마에서 시작된 비파사냐이다. 

-미국에 300,000만 신도를 가지고 있는 N.S.A(일연종 미국지부) 

미국에서 크게 부흥한 마햐야나 일연 종파는 맣은 미국인, 또 아시아인이 아닌 사람들이 주로 신도로서 ,미국에서 큰 맥을 이루고 있다. 사실 300,000신도를 NSA는 미국에 가지고 있다. 이 종파는 일본에서 시작된 것으로 남묘호랑교(창가학회)로서 불려지며 전통적인 불교의 가르침을 고수하지 않음에 그의 특성으로 나무묘법연화경, 삼을 수 있다. 이 종파는 일본에서는(Sokagaka)소카가키로 불리어지며, 미국에서는 Nichiren(일연대사) Shoshu of Amearu (NSA)로 불리어진다. 

이 종파는 일본의 스닝인(Nichiren(니히이렌)의 불교의 새로운 해석을 통하여, 불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이기적인 방법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종파의 해석은 Mandala와 Montra의 유효성에 중점을 두어 불교의 개인 수양을 통하여 정신적 육체적인 아픔을 치료하고 ,물질적인 이익을 개인에게 줄 수 있는 점을 강조한다. 즉 이것에서 말하는 물질적인 이익이란, 직업, 부, 좋은차, 좋은 집, 좋은옷, 여행과 좋은 관계 유지등을 자기 수양을 통하여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불교의 다른 해석을 통하여 NSA는 사회성, 가족성을 강조하여 신도들을 가르치고 있다. 

  
NSA의 해석을 살펴보면 

1.우리는 진실의 불교정신을 수행한다. 

2.모든 불교인은 NSA의 조직이 필요하다. 

3.NSA의 조직 없이 개인은 불교정신을 실행할 수 없으며, 그들의 행운 또한 감소한다. 

4.다른 모든 불교종파는 완전하지 못하며 

5.개인은 남묘호랑교를 계속됨으로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6.모든 사람은 집회에서 그들의 성공이나 문제를 함께 토론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NSA에서 가르치는 대로 그 신도들을 헌신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다른 불교를 인정하지 않고 그들만이 옳고 그름을 결정한 굉장히 개인적인 불교도들이다. 이 NSA의 강요성 때문에 일단 이 종교에 몸을 담았다가 떠난 사람들은 불교도에 관한 아주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됨은 당연한 것이다. 여기에서 NSA의 미국불교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기로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불교파는 일본원 Nichiren 혼자의 해석으로 참 불교정신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NSA에서 사용하고 있는 불교정신은 중국의 Tcen Tai Troclin(티타이)전통성에서 빌어왔다. 이 정신에서 NSA는 그들 조직의 운영이나 신도들의 삶을 규제하는 방법으로 삼고 있다. 

그들의 경험을 통하여 갖고 있는 마음의 10가지 상태를 살펴보면 인간의 고통은 우리가 겪은 아픔이나 편협성을 포함하며 

 1.인간의 고통은 우리가 겪은 아픔이나 편협성을 포함하며 

2.욕망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며 

3.본능이란 우리가 느끼는 그 자체이다. 

4.화란 경쟁력에서 나온 것이며 

5.인간성이란 보통인간사를 말한다. 

6.행복이란 인간이 그들의 희망을 채우는 것이며 

7.배우는 것이란 지식을 인식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들의 지식을 넓고 깊게 함으로서 기쁨을 느끼며 

8.흡수란 창조의 기쁨을 원하는 것으로, 변화하는 힘을 상태를 즐긴다. 

9.Bodhisattva 남을 돕는 것이다. 

10.불교도란 삶의 진실성 그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다. 

  사람은 과거 ,현재, 미래를 이해함으로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정신적인 상태를 누린다. 이러한 10가지의 마음의 상태는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이 10가지의 마음의 상태는 마음의 10가지 사실들에 의하여 형성된다. 

1.사물의 주어진 형상: 이것은 고통의 외형이며 

2.개인의 마음, 정신, 지혜 : 우리의 마음의 상태가 얼마나 불교정신과 어긋나며 

3.위의 1.2가 일으키는 결과 

4.힘, 유전되는 육체와 정신의 근본 

5.정신적 육체적인 힘 : 개인은 내적인 힘이 있으나 이것은 밖으로 넓혀지지 않으며, 이 힘의 외형의 긍정적, 부정적 요소 

6.선천적인 원인은 현상을 가져온다. 선천 힘은 항상 현재 삶의 부분이 된다. 

7.내부의 원인이나 상태가 행위를 통하여 유전적인 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고로 모든 행동은 내부의 원인 결과다. 

8.잠재력은 선천성과 후천성의 결과로 나온 것이다. 

9.명확한 효과, 선천성의 원인은 선천성의 결과에 의한 후천성의 원인에 의하여 증가된다. 

10.위의 모든 9가지 요소의 조합성위의 9요소는 서로 분리되어서 존재하나 그것은 전체적으로는 서로 연관되어 있으므로 어느 요소하나가 빠져도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첫번째 3가지 요소는 정신적, 육체적 삶의 사실성으로 설명하며, 다음의 7가지는 삶이 작용되는 것을 설명하였다. 또 NSA는 10가지의 마음의 상태를 인간의 경험을 통한 삶의 상태를 설명하며,10가지의 요소는 삶의 움직임과 자연의 법칙이 이 범주에서 적용되고 있음에 설명하고 있다. 

NSA는 불교정신을 가르치기 위해서 조직성을 강조한다. 물론 Mahhuyova불교정신의 NSA로서 대표되는 것은 아니지만 NSA의 특수한 조직성은 뛰어난다. 

 Mahuyova에는 NSA 외에 

1. 조게종 태고종 

2. 원불교 

3. 참선 

4. 순수땅(Pure Lcvd) 

5. Shingon 

6. Nichirev(인연대사) 

7. Meditutm(참선,수행) 

8. Chon Tewpls S Mcnsteres 

9. 독립불교 등이 미국불교에 있다. 

  다음은 미국불교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세번째의 Vajarayona(바자란냐) 전통불교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 불교도 기본적인 특성은 부처님의 신비로운 가르침을 가르치는 선생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7-9년 전부터 이 종파는 미국의 불교로서 점점 성장하고 있다. 모는 신비(비법)의 불교전통을 그 출발의 3개의 지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중국의 Chen you 

일본의 Shingor 

티벳의 Vajrayona이다. 

이 종파들은 상이점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으나 ,미국불교에서 가장 널리 퍼져있는 티벳전통의(Vajrayona)에 관하여 여기서 설명하고자 한다. 

사실 이 티벳전통의 불교도가 되기 위해서는 선생이 필요하기 때문에 다른 불교파보다는 개인적인 경제성이 불교도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불교는 경제적 여유가 있어 선생을 구할 수 있는 미국 중상류계층에서 널리 퍼져 있다. 

여기에서 티벳전통불교에 미국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그 두가지 요소를 지적해 보겠다. 

  

1. 그들의 가르침은 남성과 여성의 힘과 그 힘의 통합에 중심을 두고 있다. 

 2. 또 이 가르침은 인간들이 죽음에 임할 때 보다 나은 다음세대의 출생을 위하여 행하여야할 것을 가르친다. 

  

다음은 왜 미국인들이 불교도가 되나? 

 왜 불교가 미국에서 점점 성장하고 있냐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이 대답으로 가장 많이 주장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사실 아시아의 종교에 매혹되었던 미국인의 수자는 1960년대를 계기로 감소하고 있으며, 또 이러한 미국인들은 주로 그들의 가족의 종교나 문화에 만족하지 못함에 불교도가 되었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어떤 종교의 종교인이 되지 않음에 사회적 소외감을 느낌에, 이 소외감을 이기기 위해서 다른 종교를 찾는다. 또 여기에 이러한 대답은 1960년과 1970년의 해석으로는 충분하나, 현대 미국에 성장하는 불교도들을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현대문명 속에서, 돈과 부의 물질만능을 자신의 행복으로 추구하는 사회성에 많은 개인들이 정신적인 안정을 찾고자 종교를 찾기 시작했으며, 특히 인간성이 한해한해 상실되는 미국인들에게서 그들 나름의 종교성이고 신념을 발견할 수가 있다. 또 현재의 많은 미국인들이 그들의 종교의 전통성을 고수하지는 않고 있다. 

  다음에서 불교가 미국에서 증가하는 이유를 상세히 설명해보기로 한다. 

  첫째로 불교정신이 미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는 이유는 불교는 실용성에 기인하여 가르치고 개인들이 마음을 밝혀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답을 주기 때문이다. 즉 불교는 가능성의 종교이다. 불교 정신이 깨달음은 죽음을 인정하고 주어진 삶을 부정하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방법을 가르친다. 

또 다른 현상은 불교에서는 많은 수업을 대중에게 무료로 주고 있다. 사실 미국에서는 많은 상업적인 단체들이 불교의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이 단체들의 훈련이나 세미나에 참가할 시간이나 돈이 없는 많은 미국인들이 절이나 불교센타에서 여는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그들의 지식을 넓힘에 있는 것이다. 또 더 나아가 미국내에 불교학자들의 인구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많은 대학에서 불교철학을 가르치며, 또 어떤 대학에서는 불교연구 학위를 제공하기도 한다. 또 많은 불교신도들이 기독교를 전공하며, 대학에서 교재로 사용되고 있는 책들은 기독교를 전공한 불교인들에 의해서 씌여진 것이다. 또 미국에서는 불교학자들을 많이 키우고 있다. 그들은 불교국의 언어를 익히고 그 나라의 문화나 전통까지 배운다. 

결론적으로 미국에서 불교가 성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또한 어느 종교나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로 불교인들의 종교적 신념도 그 개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이다. 

 불교의 장래성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신비의 불교(티벳)의 장래성이 없다. 신비의 불교는 일반인들이 책을 읽거나 공부할 수 없을 때 발전되었으며, 이때에는 남묘호랑교나, 여러 종파들의 개인적인 해석으로서 그 종파의 성격을 특정 지었다. 하지만 어떤 개인이 어떤 종파에 속해야 한다는 확신의 사실들은 현대문명 속에서 사라졌다. 

미국의 불교는 미국의 문화에 접할 수 없었던 그 인민특수한 집단의 성격 때문에 여러 종파로 소개되었다. 이에 첨가하여 불교는 그의 책들이 가장 기본적인 것만 해도 60권이 넘는다. 이것은 2.3권의 기본적인 책을 가지고 있는 다른 종교와는 비교를 할 수가 없다. 사실 불교가 융성한 아시아의 불교인들이 이 책을 다 읽지는 못한다. 하지만 아시아의 여러나라에서 문서화된 불교의 가르침은 정교하고 값진 하나의 현대사회의 과학이다. 불교는 인간과학이며, 인간이 그들의 삶을 통하여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는 과학이다. 만약 사람이 그들의 삶의 목적을 규정짓기 위해서 왜 이 세상에 존재 하냐, 왜 사냐 등을 밝히고 싶다면 불교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그것을 찾을 수 있다. 사실 불교철학은 하나의 해답을 내리기보다는 확신의 해답을 주는 것이다. 

사실 불교의 미래는 형이상학의 기인함이나 문화적인 배경 즉 불교국(인도, 한국, 중국, 스리랑카, 일본, 버어마 등의 아시아로)에서 벗어나서 인간 삶의 과학으로 그의 발전을 계속할 것이다. 또한 불교종파의 이기적인 해석을 주로한 종파들은 실천성을 통하여 이론적인 왜곡성을 수정할 것이다. 어떤 선생의 인간성이나, 어떤 종파의 성격을 떠나서 개인자각의 종교로서 발전할 것이다. 

사실 미국불교인들이 형성한 구미불교회등은 이에 따른 새로운 경향으로 해석된다. 사실 이 구미불교회의 모든 회원들이 자신을 불교인으로 믿는 것은 아니다. 불교의 가르침을 숭배하고 존경하는 미국과 캐나다의 기독교인들이 이 조직이 회원이기도 하다. 또한 무신론자들이 이 불교의 가르침을 통하여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이해하고 향상시키기 위해서 이에 참가하기도 한다. 

평화로운 세계를 기원하는 사람이나, 마음의 승리로서 자신의 육체적인 아픔을 이겨보자는 많은 사람들에 이에 동반한다. 사실 미국불교협회는 모든 불교인들을 함께 뭉쳐 보자는데 그 뜻을 두며, 그 종파를 떠나서 인류에 이익을 주는 과학으로 불교정신을 발전시키고자 한다. 사실 불교의 장래는 아시아보다는 미국에서 그 장래가 결정될 것이다. 

  유럽불교의 현주소 

  이제 불교는 동양의 종교일 수만은 없게 되었다. 서구 지성인의 양심으로는 불교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불교가 서양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에 벌써 지 중해 연안과 그리스 로마에까지 전해졌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불 교가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 부터 였으며 20 세기에 들어서서는 상당한 수준에 올라왔다. 서양 종교의 선교사들이 식민 정책의 후광을 업고 주입시켰던 아시아에서의 선교와는 달리 불교는 지금 서양인들 스스로의 자각 과 관심에 의해 불교를 연구하고 전법 활동을 벌이고 있다. 지금의 서양은 활발한 불교 연구가 전개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1. 영국의 불교 

  대영제국 식민지인 인도, 버어마, 스리랑카의 영향으로 초기에는 소승 불교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1920년대쯤에서는 스즈끼 박사의 선(禪)에 관한 책들이 출현하므로써 영국 불교는 선불교가 급성장 하게 되고 선불교와 더불어 대승 불교가 서서히 영국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영국 불교는 완전히 수행위주의 불교가 되었으며, 불교가 영국에 완전히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 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영국 불교 단체의 주소록에 의하면 약 300여개의 단체가 있는데, 우리 나라의 본사(本寺)격에 해당되는 수도원으로부터 집 한 채에 이르는 포교당 내지는 선센터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다. 불교 대학도 하나 있고 전문 불교 서적만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만도 대여섯 군데나 된다고 한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실제적이고 철두철미한 성격의 영 국인들이 불교를 탐색하는 데는 거의 100년이라는 세월을 필요로 했다. 결국 영국 불교는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영국 불교의 장래는 매우 밝다고 하겠다. 

  

2. 프랑스의 불교 

  프랑스는 카톨릭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국가이다. 인구 약 5천 5 백만 가운데 형식적이나마 거의 대부분이 카톨릭이다. 대부분의 프랑스 인이 카톨릭이라고는 하지만 중산층과 젊은 세 대의 절대 다수가 종교적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공식 여론조 사에서 밝혀졌다. 프랑스의 불교는 인도차이나에서 온 이민 불교가 현재 막강하 다. 프랑스인들은 처음에는 이론적인 연구가 주가 되었으나, 2차 세 계대전을 전후하여 직접 수행하는 불교 인구가 나타났다. 60년대부 터 프랑스에서는 선센터와 티벳 불교 센터가 생겼으며 80년대에는 수행하는 불교인이 현저하게 증가하고 있다. 85년 7월경 세계적 권 위지인 "르 몽드" 에서는 마침 스위스에 와 있는 다라이라마와의 인터뷰 기사를 전면 게재하는가 하면, 티벳 불교를 4회에 걸쳐서 소개하는 등 불교 붐을 일으킨 바 있다. 영구에 비해서 불교 단체 수는 적으나 질적인 면에서는 만만치 않다. 파리의 쁠라스디탈리에 본부가 있는 선센터는 지방에 큰 성 을 매입하여 전용 수도장으로 사용하는 등 연간 3천여명 이상이 이 곳에서 수행하고 있다고 한다. 본부 산하에 약 40여개의 선센터가 프랑스 여기저기에 있고 약 2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이 선센터는 자영 출판사까지 운영하면서 쉴새없이 불서를 간행하고 있다고 한다. 

  3. 이탈리아의 불교 

  카톨릭의 총본산인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 시가 수도 로마 안에 자리하고 있다. 그렇지만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신부나 수녀들이 불교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다고 한다. 산스크리스트어를 서구에 알 린 것도 신부였으며, 인도나 페르시아의 유명한 경전을 라틴어로 옮긴 것도 신부들에 의해서였다. 이처럼 불교가 단편적으로나마 바 티칸에 알려진 것은 꽤 오래 된다. 이탈리아의 불교는 소수이나 앞으로 가장 기대되는 종교중의 하 나로 부각되고 있다. 1970년대에 이탈리아 불교 협회가 조직되었고 현재는 로마를 비롯한 몇몇 도시에 선센터와 티벳 불교 포교당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해외 불교를 수업하러 나간 사람들도 꽤 있다고 한다. 

  4. 한국 불교의 해외 포교 실태 

  고대에는 일본에 불교 전파를 해줌으로서 해외 포교의 역사는 참으로 깊다. 1985년 현재 세계 10여개국에 한국 사찰 75곳에 스님 83명이 해 외에 나가 있다. 미국엔 사찰 50곳 스님 34명, 일본엔 사찰 8곳 스님 25명, 홍콩 엔 사찰 1곳 스님 2명, 대만엔 사찰 1곳 스님 8명, 캐나다는 사찰 2 곳 스님 3명, 폴란드는 사찰 8곳, 독일은 사찰 1곳, 프랑스는 사찰 1곳, 스위스는 사찰 1곳 스님 1명, 호주는 사찰 1곳 스님 2명 등이 포교활동을 하고 있다.